본문 바로가기
정보창고/역사

역사 인물 바로알기 (1) 이완용

by 정보알려주는다올 2020. 5. 7.

안녕하세요 다올입니다. 올바른 역사 정보를 찾기 위해 노력중입니다. 그 일환으로 인물사를 한번 이어가볼까 하여 첫번째론 매국노라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이완용, 그저 나라 팔아먹은 새끼라고 생각만하지 자세한 내막은 다들 모르시기에 첫번째로 다뤄보고자 합니다.



이완용은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고, 이때부터 출세에 굳은 의지를 불태웠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후, 종친인 이조참판을 지낸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 조선은 혼란기였습니다.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 내부에서 근대화의 노력이 있던 시기였죠. 일본처럼 우리도 빨리 입헌군주제, 신분제 철폐 등 이렇게 개혁해야 한다는 급진 개혁파도 있었고, 천천히 개혁해야 한다는 수구파도 있었습니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같은 사람들이 급진개혁파였다면 이완용은 젊었음에도 아버지와 함께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모티브로 개혁을 원한 수구파 였습니다. 첨에는 친일을 한게 아닌 친청을 한 사람이였죠.


김옥균의 세력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외국으로 다 튀다보니 젊고 유능한 인재가 이완용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고종의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당시 고종은 미국빠였는데, 미국이 워싱턴에 조선공관을 세우게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조선공관을 세운다는 건, 민국이 조선을 독립국으로 청나라와 동등하게 인정한다는 뜻으로 청나라의 내정간섭을 싫어했던 고종은 이를 고무적인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후 이완용은 미국에 외교관 자격으로 미국공관 공사로 가게 됩니다. 영어를 곧 잘했었죠. 거기에서 이완용은 미국물을 먹고 미국빠가 되어 돌아와 공교육제도를 가지고와서 초등교육을 의무화 시킵니다. 천자문이 아닌 수학과 과학같은 학문을 가르칩니다.


이때 청일 전쟁이 터집니다. 청나라가 강한줄 알고 양무운동을 주도했는데 청나라가 지고 일본이 이겨버립니다. 갑신정변때 외국으로 튀었던 이들이 복귀를 하고, 아버지 이호준이랑 수구파 되기전에는 대원군한테 붙었는데, 대원군이 축출되니 민씨세력 수구파에 붙었다가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니 급진개화파에 발을 얹지는것을 봤을때 처세술이 좋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소심하고 말을 신중하게 한 성격이 한 몫 하지 않았나 합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 고종의 신임을 전적으로 받았는데, 이때 일본은 명성황후(민비)를 시해합니다. 이완용은 반일 정치세력을 모아, 아관파천을 주도하며 고종은 자기를 살려준 이완용에 대한 신임이 더욱 커져 한때는 3개 대신을 동시에 맡기기도 합니다. 청나라가 패한 이후 이완용은 영안문을 철거하고, 독립문을 세우는데 많은 기여를 했으며, 독립문 지을때 가장 많이 헌납하였고, 현판도 쓰게 됩니다. 독립협회를 열고 만민공동회를 열어 일제에 맞서는 움직임도 보였습니다. 연설에서도 국모를 죽인 일제에 맞서고 미국처럼 독립을 쟁취하고 강대국이 되어야 한다고 자주 말을 합니다. 자비를 털어 독립신문에 투자하는 등 애국활동 노력을 했던것은 사실입니다.


독립협회가 조정의 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하고 급진적으로 변하면서, 자신의 정치 인생의 위기를 느낀 이완용은 독립협회와 거리를 두기 시작하고, 거기에 공금횡령한 것이 적발되며, 독립협회에서 제명이 됩니다.


하지만 더 큰 위기가 오는데,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게되자, 이완용은 미국을 어떻게든 끌어들이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가쓰라 테프트 조약에서 미국도 일본의 손을 들어주니(미국이 일본의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인정, 필리핀을 갖는 조건으로 조선에서 손을 뗀다는 것) 이때부터 친일파로 돌변을 한 것입니다.


을사조약 체결 과정(1905년 11.10~11.18)

https://m.blog.naver.com/kmji98/221366724517


을사조약을 체결하며 이완용은 빼앗긴 외교권은 되찾아오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한국의 민중들은 빡쳐서, 반일단체들이 두 번이나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지르고, 2차 화재때는, 집의 모든것, 조상들 위패까지 다 타버려 알거지가 됩니다. 이때 도와준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와 자기 이복형제들이였습니다. 고생이 많았는지 이 시점부터 친일에 더 앞장을 서게 됩니다. 정미늑약 체결로 내정을 일본에 넘기고 당시 일어난 의병들을 잔인하게 진압하고, 이토를 죽인 안중근 의사를 강하게 비판을 합니다. 기유각서로 사법권을 일본에 넘기기도 합니다. 계몽운동과 독립활동도 강하게 저지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일병합조약에 서명하며 일본에 나라를 넘겨버리며 일본으로부터 백작이라는 귀족의 칭호와 15만원을 받게 됩니다.


이완용은 개인 공명을 위해 나라를 넘긴 것이죠. 그 댓가로 15만원을 받았으니 말입니다. 당연히 나라를 매도한 사람이 맞습니다. 일본어를 한마디도 못해 항상 통역관을 붙이고 다녔습니다. 영어는 20대때 친일을 할땐 50대 이기에 일본어를 안배운 것입니다. 처음엔 충신이였던 이완용이 나중에는 일본에 나라를 넘겼기에 우리가 매국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참고 : https://youtu.be/8p01wxs0o2I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