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다올입니다. 요즘 생각해보면 올바른 역사관 만큼 중요한게 없다고 생각되는데요. 잘못된 역사로 기술되어 있는 4·3사건에 대해 알아보고자 글을 써봅니다.
<제주 4·3사건>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 중 30만명의 도민 중 10%인 3만명이 사망한 사건 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 1998년 11월 2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CNN인터뷰에서 "김일성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의 폭동이면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많은 사건" 이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4·3사건 배경>
일제 강점기 말엽 가장 수탈이 심하던 곳 중 하나가 제주도 였습니다. 당시 미국의 계획 중 제주도를 점령해 일본 규슈로 들어간다는 결7호 작전이 떠돌았기 때문에 일본은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제주도를 요새화 시키고 제주도민에게 군사훈련을 시킵니다. 모둔 제주도민들이 요새화 건설을 위해 투입됩니다. 당연 일본에 악감정이 많았던 것입니다. 해방이 된 이후에는 경찰이 부족해 일제때 순사를 지냈던 경찰들이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제주도 이외의 지역은 순환이라도 했지만 제주도는 섬이였기에 그 안에서 움직인다해도 다 제주도 안이였기에 그대로 제주도 치안을 맡게 됩니다. 이 이유 말고도 타지에서 데리고 온다하여도 제주도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기에 육지에서 온 사람과 제주도 사람의 언어가 사투리 때문에 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언어 소통이 힘들어 일본어로 대화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민,관,군의 호흡이 하나도 안 맞은 것입니다.
당연히 반일 감정이 심했던 이 지역을 이용하기 위해 남로당의 주최로 1947년 3월1일 3.1운동 기념식에 많은 군중이 모여 고양된 상태였습니다. 이곳이 단순한 3.1운동 기념식이였다면 경찰이 왜 투입되었을까요? 본질은 남로당의 주최하 일어난 기념식이였습니다. 남로당 중앙당이 제주도당에 지시사항을 보냈는데, 복장은 전투식으로 하며, 집회장소에 인민위원회기를 들게하고 인민위원회로 정권양도 박헌영 체포철회 등이 있었습니다. 이름만 3.1절 기념식이였지, 내용은 공산화 운동이였습니다. 이때 기마경찰이 실수로 기마와 여자아이가 부딪히는 사건이 발생을 했는데,(일설엔 누군가 일부러 기마의 엉덩이를 죽창으로 찔렀다는 말이 있습니다) 경찰이 몰랐는지 그냥 가게 되지만, 군중은 경찰을 미워하던차에 일어난 일이라 경찰에게 돌을 던지고 경찰서까지 쫓아가서 습격을 합니다. 당연지사 수만의 군중들이 돌과 무기를 가지고 경찰서로 왔으니 그에 두려웠던 경찰이 발포하여 그 난리에 6명이 죽고 6명이 부상을 입은 것입니다. 그 가운데 아기와 엄마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3.1절 발포 사건입니다.
이후에 미군정은 발포 잘못을 시인했지만 정당방위로 어쩔수 없었다고 발표 했는데, 남로당에겐 이만한 먹잇감이 없었던 것입니다. 남한 단독 정부수립인 5.10선거를 방해할 목적과 또한 3.1발포 사건을 계기로 딱 맞아떨어진 것이죠. 이런 수법은 중국 공산당, 베트남 공산당, 북한 이들의 전형적 수법이니 말입니다. '민중봉기'를 유도하는 것 말이지요.
남로당은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있었고 피해자 성금 모금과 남한정부 수립반대, 인민위원회로 정권 이양 이런류의 운동을 계속 합니다. 그래서 제주도에서 총파업이 일어나 노동자 4만명이 파업하고 경찰의 20%도 파업에 동참 합니다. 주모자를 체포하다보니 당시 감옥에 자리가 없었을 정도라 했을 만큼 치안이 좋지 못했습니다. 파업에 동조한 경찰은 파면되고 치안 유지를 위해 그 공석에 서북청년단(극우익단체)이 투입 됩니다. 이게 바로 4·3사건의 원인이 됩니다.
<4·3사건 발발>
5.10 총선이 다가오자 남로당의 김달삼이 350명의 무장공비와 함께 새벽2시~4시경 제주도 경찰서의 12 곳을 일제히 습격합니다. 하루동안 경찰, 우익인사, 그 가족들 어린아이 포함하여 27명이 무참히 살해됩니다. 이게 바로 4·3사건의 시작이였습니다. 주동자 김달삼은 제주도민들에게 기초 군사훈련을 시키고 1000명이 넘는 제주도민을 무장시키고 가담을 시켰습니다. 이후 당연히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이제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시작됩니다. 남로당원 500명, 제주도민 1000명이 여기에 가담해 마을과 한라산을 넘어다니며 게릴라전술을 펼친 것입니다. 확인된 숫자로만 경찰군인 300명이 희생되었고 제주도민은 1만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아직 밝혀지진 않았지만 민간인 6만명 이상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동한 공산당 김달삼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 해 6월에 북한으로 유유히 탈출을 합니다.
<결론>
그 당시 억울하게 돌아가신 경찰 군인 민간인분들에 대한 애도는 당연히 사람으로써 하는게 맞습니다. 4·3사건의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추모라면 당연히 해야합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보상과 위로는 당연한 것입니다. 민간인들이 잔인하게 살해되고 그 가운데 어린이와 노인 희생자들이 학살 당했다는거 역시 너무 슬프고 가슴이 아픈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빼먹고 있는 사실이 분명 있습니다. 이 사건은 말 그대로 4·3사건 입니다. 1948년 4월 3일에 김달삼을 비롯한 무장공비가 제주도 12개 경찰서를 습격한 사건인 것이죠. 바로 공산당 세력의 소행이였다는 것입니다. 한데 이 사건의 본질이 변해가고 있습니다. 잘못된 사건의 분노는 수괴인 김일성과 남로당 그리고 김달삼으로 향해야하는데, 북한탓은 거의 본적이 없고 그 분노가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으로만 쏠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4·3사건에 대해 저와 생각이 다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당신이라면 공산당 깃발을 든 무장을 한 성난민중을 어떻게 상대하였을거 같습니까??? 말로 타이르겠습니까? 아니면 제주도를 공산당에 넘기고 떠나시겠습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그 가운데 억울한 민간인들 분명 존재했습니다. 어린아이와 노약자가 뭘 안다고 죽였는지 저도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공산당에 더 분개해야 하는 겁니다. 걔네들의 수법이 다 그렇습니다. 군대와 군대가 싸우는 전법이 아니라 무고한 민간인을 인질로 써가며 무장투쟁을 합니다. 민간인들 사이에 숨어서 총질하면서 민간인들을 방패로 쓰죠? 중국공산당, 북베트남 다 그런 게릴라전 방식이였습니다. 그러다 민간인이 죽게되면 얼쑤 좋다하며 선동하는 수법이죠. 현재 동아시아 공상화국가가 다 그렇게 공산화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4·3사건에서 당시 정부를 규탄하고 우파를 규탄하고 미군을 규탄하는 시위는 많이 봤는데, 막상 북한을 규탄하는 시위는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학생들 중에 4·3사건을 민주화 운동으로 생각하는 친구들을 봤습니다. 잘못된 역사관이 이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4·19나 5·18과도 성격이 다른 사건입니다. 민주화운동이 아닌 명백한 폭동입니다. 역사적 사건 뒤에는 그 사건의 성격을 놓고서 평가합니다. 4·3사건은 제주도민과 당시에 경찰관의 마찰을 이용해 5·10 총선거를 반대하는 김일성의 지시로 무장공비들이 선동해 일으킨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김달삼을 비롯한 무장공비들과 공산당에 가담한 사람들과 억울하게 희생되신 당시 민간인분들을 같은 범주에 포함시키면 안됩니다. 분노의 대상은 바로 김일성과 남로당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더 우스운건 아까 언근했던 김대중이 공산당의 폭동이라 말했을때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우익인사가 폭동이라 말할때는 엄청난 이슈와 논란거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제주 4·3사건에 대한 인식이 반 우파적인 성격의 운동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장공비와 싸우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순국한 군인과 경찰도 추모가 되어야 합니다.
참고 : https://youtu.be/doRqkZDNdZ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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