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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창고/역사

반면교사 삼아야할 쿠르드족

by 정보알려주는다올 2020. 4. 25.

안녕하세요 다올입니다. 듣기에도 생소한 쿠르드족을 통하여 우리가 앞으로 어떻해 해야하는가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시기 바라는 마음에 글을 남깁니다.



쿠르드족은 어떤 민족일까요?

쿠르드족은 중동에서 아랍인, 터키인, 페르시아인 다음으로 인구가 많고, 종교는 대부분 이슬람교 수니파에 속하고, 그 밖에 수피파, 야지디파 등이 있습니다. 쿠르드족은 7세기 경 이슬람교로 개종했죠. 언어는 인도유럽어족 이란어파에 속하는 쿠르드어, 키루다시어를 독자 언어로 사용합니다. 전통적으로 쿠르드족은 메소포타미아 평원, 터키와 이란의 고원지대에서 양과 염소를 치는 유목민으로서 생활을 해왔고, 농사는 최소한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쿠르드족의 유사 이전 시대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4,000여 년 전 현재의 이란, 이라크 국경지대에 있는 자그로스 산악지대에 살던 고대 민족 구티(쿠티)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대 문헌에 등장하는 수메르의 구투(Gutu, Guti, Gutian people)나 그리스-로마 기록의 퀴르트(Cyrtians) 혹은 카르두키(Charduchi) 등에서 쿠르드족의 기원을 찾기도 합니다. 메소포타미아 제국 초기의 기록들을 보면 쿠르드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산악부족들이 자주 언급됩니다. BC 401년 지금의 터키 국경 바로 남쪽 이라크 자후 근처에서 크세노폰과 텐사우전드를 공격했던 카르두초이족은 쿠르드족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쿠르드족은 기원전 3세기부터 중동 일대에서 고유의 언어와 생활양식을 지키며 살아왔지만 파르티아나 사산왕조 시대까지는 여러 이란계 부족 중 하나 정도로 취급되어 왔습니다. 중세 아랍 이슬람 세력의 침공으로 이란이 아랍 제국에 복속된 뒤 옛 이란의 서부 변경 지역(캅카스-아제르바이잔-구 메디아 일대)에서 이란계, 아르메니아계, 아랍계, 튀르크계 등이 뒤섞이며 단순한 이란계 종족이 아닌 독자적인 종족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 쿠르드족입니다.

시리아 인근의 중동 지역에서는 아랍족과 이란족, 터키족 다음으로 4번째로큰 민족인데 자기들의 고유의 특성이 있는 민족이지만 특이하게도 한번도 자기만의 국가를 가져본적이 없는 민족입니다.

자기들만의 고유 언어와 민족성이 있어 수십번 독립을 하려고 하였으나 그때마다 주변 4개국가에 탄압을 항상 받곤 하였죠.

이들은 수 많은 배신을 받았습니다. 그에 대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배신 당한 쿠르드족

1920년 8월 20일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연합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세브르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었고, 터키 외의 영토는 모두 승전국이 점령했죠. 지중해 동부의 중근동 지역은 오랫동안 눈독을 들여온 영국과 프랑스가 분할해 위임통치령으로 삼았습니다. 이라크와 요르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고,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위임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이스탄불 주변의 유럽 영토인 동트라키아의 대부분, 아나톨리아 반도(터키 본토) 서부의 스미르나(오늘날의 이즈미르)는 그리스에 할양되었으며, 터키 동북부는 아르메니아에 할양하고, 동남부 쿠르디스탄은 쿠르드족의 독립국가 건국을 위한 땅으로 남겨졌다. 세브르 조약은 오스만 제국에 매우 가혹하고 굴욕적인 패전조약이었지만 쿠르드족에게는 독립국가 건설의 희망을 안겨 주었죠.

미국, 로잔 조약 지지로 쿠르드족 첫 번째 배신

하지만 더 많은 영토를 원한 그리스가 터키를 침공했다가 1922년 패전하면서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터키 군부는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고 터키 공화국을 수립했고, 터키 청년 장교들은 굴욕적인 세브르 조약을 거세게 반대했습니다. 터키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그리스,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등 연합국과 재협상해 세브르 조약을 무효화하고 로잔 조약으로 바꾸었죠. 로잔 조약은 아랍 국가들의 수립을 승인한다는 조항은 재확인했지만, 아르메니아와 쿠르디스탄에 관한 조항은 삭제했습니다. 타협안에서 배제된 모술의 장래 문제는 국제연맹에 위임되었습니다.

로잔 조약으로 터키는 1894년 당시 소유했던 동트라키아와 스미르나는 물론 아르메니아와 쿠르드족에게 주기로 했던 동남부 영토도 돌려받았습니다. 미국은 로잔 조약을 지지했습니다. 미국이 쿠르드족을 배신한 첫 번째 사례 입니다. ​

영국 로잔 조약에서 쿠르드족 배신

영국은 로잔 조약에서 쿠르드족의 독립을 무산시켰으며, 쿠르드족에게 주기로 한 이라크 북서부 지역에서 대규모 유전을 발견했습니다. 당시 석유 확보에 사활을 걸었던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쿠르디스탄을 영국령 이라크로 편입시켰습니다. 쿠르드족은 제 잇속만 챙기려는 영국에게 쓰라린 배신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죠. 처칠은 영국인에게 위인일지 모르지만 쿠르드인들에게는 저주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라크 쿠르드족은 1922년 6월 독립을 요구하는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무력으로 개입하여 쿠르드족 봉기를 진압하였습니다. 1922년 9월 쿠르드족은 영국이 위임통치하던 이라크 중동부에 쿠르디스탄 왕국을 세웠지만 영국은 1924년 7월 무력으로 쿠르디스탄 왕국을 무너뜨렸습니다. 국제연맹은 1925년 모술을 이라크에 넘겨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은 1926년 영국과 터키, 이라크가 조인한 앙카라 조약으로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1927년 10월 쿠르드족은 터키 동부 아라라트 산 일대에 아라라트 쿠르드 공화국(Republic of Ararat)을 선포했습니다. 1930년 6월에도 이란과 터키 국경에서 봉기를 일으켰으나 두 나라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1930년 9월 터키가 아라라트 산 일대를 다시 점령하면서 아라라트 쿠르드 공화국은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이라크를 점령하고 있던 영국군은 터키의 아라라트 산 일대 재점령을 수수방관했습니다. 쿠르드족은 1931년에도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을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1932년 4월에도 반란을 일으켰다가 영국군의 지원을 받는 이라크군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세브르 조약과 로잔 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멋대로 정한 국경선에 의해 쿠르디스탄은 갈가리 분리되어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로 인해 쿠르드족 전체 인구의 45%는 터키, 24%는 이란, 18%는 이라크, 6%는 시리아에 거주하게 되었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각 나라가 국경을 강화하자 계절적인 유목생활이 가로막힌 쿠르드족은 대부분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포기하고 정착해서 농경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쿠르드족은 새로운 직업을 갖거나 외국으로 떠나갔습니다.

구 소련(소비에트연방) 이란에서 쿠르드족 배신

1939년에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쿠르드족에게는 또 한번 독립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946년 쿠르드족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란을 점령했던 구 소비에트연방(소련)의 지원을 받아 이란 북부에 사회주의 국가인 마하바드 공화국(Republic of Mahabad)을 세웠으나 이란군은 서방의 지원을 받아 마하바드 공화국을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쿠르드족의 다급한 지원 요청에도 소련은 군사적 지원을 하지 않았습니다.

쿠르드 공화국은 수립한 지 1년도 안돼 궤멸당하고 말았으며, 소련이 쿠르드 공화국을 세우게 한 것은 이란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속셈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소련은 이용만 하고 나서 쿠르드족의 등에 칼을 꽂았습니다. 쿠르드족은 소련으로부터도 배신을 당했던 것입니다.

미국 존 F 케네디 행정부의 두 번째 배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초강대국이 된 미국은 중동에서 제국주의 영국의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했고, 미국은 이라크 내 쿠르드족에게 무기를 공급해서 무장시키고 이라크 중앙정부에 맞서도록 도왔습니다. 1932년 영국이 세웠던 이라크 왕국은 1958년 군사 쿠데타로 무너지고 반영주의자 아둘라 카심이 총리 겸 국방장관을 맡아 서방에 맞섰습니다.

압둘라 카심

1963년 이라크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아랍사회주의부흥당(바트당)의 군사 쿠데타가 발생해 카심이 제거되자 쿠르드족에 대한 군사 지원은 즉각 중단됐으며, 미국은 이라크의 새 정부에 네이팜탄 등 군수물자를 지원했으며, 바트당 군사정권은 이를 쿠르드족 학살에 사용했습니다. 미국이 쿠르드족을 배신한 두 번째 사례 입니다. ​

미국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세 번째 배신

1970년 이라크 바트당 정부는 쿠르드족에게 제한된 자치권을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쿠르드족의 소망이던 자치 확대와 쿠르드어 지위 향상, 사회보장 혜택, 공정한 개발정책 등은 기대난망이었죠. 1972년 쿠르드족은 미국과 이란의 지원을 받아 이라크 내 쿠르드 자치정부 수립을 위해 이라크군과 3년 동안 싸웠습니다. 당시 이란 팔레비 왕조와 결탁한 미국은 이란과 국경 분쟁을 벌이는 이라크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쿠르드족에 무기와 자금을 댔으나 이란과 이라크가 협상을 통해 국경 분쟁에 합의하면서 쿠르드 독립의 꿈은 또다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미국과 이란은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미련없이 쿠르드족을 배신했습니다.

1979년 이라크에 들어선 이슬람 수니파 중심의 사담 후세인 군사정권은 친소정책을 펼쳤습니다. 이에 미국은 이라크 쿠르드족을 다시 무장시켜 중앙정부에 맞서게 하는 정책을 추진했고,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당시 친미 국가였던 이란을 통해 이라크의 쿠르드족에게 무기를 공급하려고 했지만, 이란은 이를 반대했습니다. 쿠르드족이 이라크 중앙정부를 상대로 군사적 승리를 거두면 독립을 추진하게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이란의 쿠르드족도 독립국가 건설에 참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은 이란의 팔레비 왕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과 쿠르드족에 대한 무기 공급을 중단하는 내용의 협정을 맺는 것을 방관했습니다. 후세인은 협정에 서명한 직후 북부의 쿠르드족 거주지역에 군대를 보내 쿠르드족 수천 명을 학살했습니다. 미국은 한때 동맹이었던 쿠르드족을 또 다시 배신했습니다. 미국이 쿠르드족을 배신한 세 번째 사례 입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헨리 키신저는 이라크의 쿠르드족 인종학살에 대해 눈을 감았으며, 키신저는 의회에서 이 문제를 따지자 '은밀한 활동을 선교 활동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키신저는 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 가운데 가장 논란이 많은 수상자였습니다. ​

미국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네 번째 배신

1979년 이란은 이슬람 혁명으로 친미 팔레비 왕조를 몰아내고 민주주의와 이슬람 시아파 율법학자들의 감독체제가 결합된 신정체제가 들어섰습니다. 이란 혁명정부는 중동지역에 반미 이슬람 혁명의 확산을 선동했으며, 이란-이라크 전쟁이 벌어지면서 이란발 반미 이슬람 혁명의 중동지역 확산이 주춤해졌습니다. 미국으로서는 이라크가 고마운 존재였죠.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이란 견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이라크를 지원했습니다.

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 중 후세인 독재정권은 쿠르드족이 이란 편에 서는 것을 우려해 쿠르드 자치구에서 인종청소를 자행했고, 쿠르드족 대량학살 중 대표적인것은 후세인 정권이 1988년 3월 국제사회가 금지하는 화학무기인 사린, VX 등 신경독가스로 이란 국경에서 가까운 할라브자 쿠르드족 마을을 공격해서 하루만에 5,000명을 학살하였고, 1만여 명에게 신체 손상을 입힌 전쟁범죄 사건이었습니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유태인을 절멸시키려고 했던 것처럼 후세인 정권의 만행으로 할라브자 쿠르드족 마을은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고, 국제기구는 후세인 정권 통치 24년 동안 쿠르드족 30만 명 이상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할라브자 공동묘지에는 화학무기에 희생된 쿠르드족 1,500명이 묻혀 있습니다. 이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아 그런지 모르는 사람이 많은거 같네요.

학살된 쿠르드족이 묻힌 할라브자 공동묘지

미 레이건 행정부는 후세인 정권이 화학무기를 사용해서 쿠르드족을 대량학살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침묵으로 일관했으며, 레이건 뿐만 아니라 미국의 책임 있는 당국자 누구도 사담 후세인의 쿠르드족에 대한 인종학살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감탄고토(甘呑苦吐)의 달인 미국은 또 다시 쿠르드족의 등에 칼을 꽂은 것이죠. 미국이 쿠르드족을 배신한 네 번째 사례 입니다.

미국 조지 H W 부시 행정부의 다섯 번째 배신

1990년 이라크 후세인 정권이 석유를 노리고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른바 걸프전이 벌어졌습니다. 미국 조지 H W 부시 행정부는 서방국가들과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국가 연합군을 조직해 이라크 격퇴전, 이른바 '사막의 폭풍 작전'을 전개했다. 이라크군을 쿠웨이트에서 격퇴한 후 부시는 '이라크 군대와 국민이 스스로 나서서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권좌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후세인 축출을 겨냥해 이라크 내부의 봉기를 촉구한 것입니다.

이슬람 수니파 중심의 후세인 정권에 맞서던 시아파는 이라크 남부, 쿠르드족은 이라크 북부에서 부시의 호소에 호응해 봉기했지만, 이라크군이 시아파와 쿠르드족에 대한 무차별 진압작전에 나섰음에도 미국은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방관하고, 끝내 이들에 대한 군사 지원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시는 쿠르드족을 이용만 하고 토사구팽한 것이죠. 미국이 쿠르드족을 배신한 다섯 번째 사례 입니다.

부시는 이라크에 민간정부가 아니라 독재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원했고,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독재자는 그만큼 다루기가 쉽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이 원한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이라크에 후세인이 아닌 다른 군사정권이 들어서는 것이었죠. 그래서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민주화 운동가들도 지원하지 않았고, 미국의 배은망덕하고 파렴치한 행동에 세계 여론이 악화되면서 부시 행정부도 뭔가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국이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 보호에 나서자 미국은 이를 지원했습니다.

미국 빌 클린턴 행정부의 여섯 번째 배신

1993년 들어선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는 쿠르드족에 대한 두 가지 시선이 동시에 존재했습니다. 이라크의 쿠르드족은 미국의 적인 후세인 정권의 박해를 받기 때문에 '좋은 쿠르드족'이었습니다. 반면에 터키 동부의 쿠르드족은 터키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분리 독립을 원하면서 미국의 나토 동맹국인 터키를 성가시게 했기 때문에 '나쁜 쿠르드족'이었습니다. 터키는 미국의 주요 무기 수입국이었고, 클린턴은 터키에 대량의 무기를 공급했으며, 터키는 이를 사용해 수만 명의 쿠르드족을 학살하고 수천 개의 마을을 불태웠습니다. 미국이 쿠르드족을 배신한 여섯 번째 사례 입니다.

1993~1994년에는 쿠르드족과 아시리아계 주민 3,200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도 했으며, 이 학살은 터키 군부와 연계된 살해단의 소행으로 추정되지만 그 진상은 아직도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레바논에서 이스라엘에 저항해 온 무장단체 헤즈볼라가 터키 정부 편에 서서 쿠르드족을 공격하고 주요 인물들을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일곱 번째 배신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민병대인 페슈메르가 (Peshmerga)는 미국 편에서 후세인 정권의 이라크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이라크전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사담 후세인은 미군에 체포되었고, 후세인 정권이 몰락하자 이라크의 쿠르드족 자치구 남쿠르디스탄 주민들은 독립의 꿈에 부풀었습니다. 하지만 2007년 쿠르드족의 독립 국가 건설을 우려한 터키는 이라크 내 쿠르드족 자치구를 폭격했습니다. 이라크 점령국인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터키의 이라크 내 쿠르드족 폭격을 승인했고, 이는 미국이 쿠르드족을 배신한 일곱 번째 사례 입니다.

오랜 세월 잔혹한 탄압과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쿠르드족은 민족주의 정치 세력을 중심으로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투쟁을 전개해 왔습니다. 하지만, 쿠르드족이 거주하고 있는 터키, 이라크, 이란, 시리아 등 4개국은 모두 이러한 요구를 철저하게 탄압하고, 심지어 쿠르드족 민간인에 대한 집단 학살까지 자행해오고 있습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쿠르드족 토사구팽 여덟 번째 배신

2014년부터 쿠르드족은 미국과 동맹을 맺고 중동 지역에서 미군과 함께 다에시(IS)와 싸웠습니다. 다에시(IS)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미국이 쿠르드족의 독립을 지원해줄 것이라는 기대에서였죠. 쿠르드족 민병대인 인민수호군(YPG)과 YPG 주측의 시리아 민주군(SDF)는 지상전에서 총알받이 역할을 하며 2018년까지 4년 동안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2019년 10월 7일 시리아 북부 지역에서 미군 철수를 선언하고 '터키가 오래 준비한 시리아 북부 군사작전을 곧 추진할 것인데, 미군은 그 작전에 지원도 개입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이어 그는 '쿠르드족은 우리와 함께 싸웠지만 이를 위해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돈과 장비를 지급받았다'며 '이제 이 말도 안 되는 끝없는 전쟁에서 벗어나 우리 군인들을 집으로 데려올 때'라고 말했고, 미군 철수 선언은 터키의 시리아 내 쿠르드족에 대한 공격을 묵인한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이어 트럼프는 시리아 북동부 국경지대 쿠르드족에 대한 터키의 공격을 암묵적으로 승인했습니다. 다에시(IS) 격퇴전의 동맹 쿠르드족을 헌신짝 버리듯이 내팽개친 것이죠. 이처럼 미국은 쿠르드족을 철저하게 배신했습니다. 미국이 쿠르드족을 배신한 여덟 번째 사례 입니다. '친구가 아니라 산을 벗하라'는 쿠르드족의 속담이 있습니다. 배반의 역사 속에 살아왔던 쿠르드족의 쓰라린 교훈이 녹아든 속담인 것이죠. ​

쿠르드족에 등을 돌린 러시아의 푸틴

트럼프의 미군 철수 선언 이틀 뒤 터키 대통령 에르도안은 터키군과 친터키 시리아 반군 시리아국가군(SNA)이 시리아 북동부에서 YPG를 몰아내기 위한 ‘평화의 샘(Peace Spring)’ 작전을 시작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터키는 미군 철수 선언 이틀 만에 쿠르드족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죠.

시리아 쿠르드족 자치정부와 YPG는 터키군과 터키군 지원 자유시리아군(FSA)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터키는 자국 내 북쿠르디스탄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반정부 분리독립 무장투쟁 단체 쿠르디스탄 노동자당(PKK)의 배후지를 차단하기 위해 시리아 북동부 국경지대 서쿠르디스탄에 30km의 안전지대를 설치한다는 목표로 '평화의 샘' 작전을 전개하고 있죠.

시리아 북동부 지역의 미군 철수로 방패막을 잃은 쿠르드족은 러시아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바드란 지아 쿠르드 시리아 쿠르드 자치정부의 고위 관리는 '미군이 전면 철수하면 안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시리아 정부나 러시아와 대화할 수 있다'며 '러시아가 시리아 정부와의 대화에서 지지자와 보증자로서의 역할을 맡아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시리아 내전에서 쿠르드족의 적이었던 시리아 정부와의 중재를 러시아 측에 요청했고, 미국의 배신에 쿠르드족은 미국의 적 러시아와 시리아 알 아사드 정부 편으로 돌아섰습니다. 쿠르드족은 그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 입니다.

문제는 쿠르드족이 이번에도 배신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에르도안은 지난 10월 9일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과 전화 통화를 하고, 터키의 시리아 북동부 지역 군사 작전 계획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러시아 크렘린궁 역시 터키의 시리아 내 쿠르드족 공습 작전에 앞서 사전 교감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러시아와 터키는 시리아의 영토적 통합성을 유지하고 주권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공감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러시아는 쿠르드족이 내민 손을 뿌리치고 이미 터키 편으로 돌아섰음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쿠르드족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수없는 배신과 토사구팽을 당해 온 민족입니다. 이들의 꿈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쿠르디스탄에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죠. 쿠르드족의 염원이 과연 이루어질지 전세계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쿠르드족의 예에서 보듯이 국제관계는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습니다. 힘이 없으면 강대국의 논리에 굴종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약소국들은 자력갱생만이 유일한 활로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공짜로 도와주는 법은 절대로 없죠. 강대국과 동맹을 맺거나 우방국이 되려면 막대한 돈과 자원, 이권을 갖다 바쳐야 합니다. 동아시아의 어느 나라처럼..... 말이죠. 우리나라 또한 주변 국가들과 우방인 미국에 관하여 심도깊은 생각을 해보시길 권하며 글을 마칩니다.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내용 참고 :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2Vdm&articleno=1374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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