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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창고/역사

한 인물로 알아보는 자아, 자신의 표현(로맹 가리)

by 정보알려주는다올 2020. 6. 17.

안녕하세요 정보를 알려드리는 다올입니다.


오늘은 한 인물(로맹 가리)로 알아보는 자아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로맹 가리는 1914년 러시아에서 리투아니아계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Roman Kacew 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1925년에 가족을 버리고 다른 사람과 재혼했고로맹 가리는 그 후 어머니에 의해 길러졌으며폴란드를 거쳐 14살 때 프랑스로 이주했습니다.

 
이런 성장의 이력 때문일까요? 폴란드인도, 러시아인도, 리투아니아인도, 유대인도, 그렇다고 완전한 프랑스인도 될 수 없었던 로맹 가리는 하나의 정체성에 자신이 묶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그의 인생은 변화무쌍함을 뛰어넘어 분열하고 증식하는 자아들이 공존하는것 같았죠.
 
파리에서 법학을 전공한 젊은 로맹 가리는 비행기 조종에 관심을 가져 프랑스 공군에 입대하고, 나치의 프랑스 점령 기간에는 영국으로 탈출해 드골 밑에서 자유프랑스 군으로 활동하며 파일럿으로 성공적인 임무를 수행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공적을 인정받아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외교관으로 일하게 됩니다.
 
외교관으로 유럽과 미국을 누비는 와중에 그는 소설가라는 또 다른 자아를 갖게 되죠. 1945년 첫 소설 『유럽의 교육』을 발표하고, 이 작품으로 비평가상을 수상해 문단에 화려하게 등장합니다. 그 후 그는 공쿠르 상을 수상하고 프랑스의 가장 인기있는 작가가 됩니다. 화려한 영광에 둘러싸인 축복받은 문학천재이자 사교계의 명사가 된 로맹 가리. 하지만 과연 그것뿐이었을까요?



◎ 로맹 가리의 또 다른 가명, '에밀 아자르'


1975년의 공쿠르상은 14살의 아랍인 소년 모모와 그를 돌봐주는 유대인 중년 여성 사이의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를 그린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에게 수여되었다에밀 아자르는 이 책 전에 『그로칼랭』이라는비단뱀을 사랑하게 된 남자의 이야기를 발표한 신인 작가였습니다. 에밀 아자르는 수상을 거부하며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고온 언론이 떠들썩하게 그를 찾았지만 결코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 로맹 가리의 인연 '진 세버그'

영국의 작가이자 유명 저널리스트인 첫번째 부인 레슬리 블랜치와 이혼한 후, 그는 LA주재 프랑스 영사로 근무하면서 미국의 영화배우 진 세버그와 만났습니다. 진 세버그는 장 뤽 고다르의 작품 <네 멋대로 해라>를 통해서 세기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젊은 여배우였죠.

두 사람은 20살 이상의 나이차를 넘어 1962년 결혼하였고, 로맹 가리는 아내인 진 세버그를 출연시킨 영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각본과 감독을 맡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못하고 1970년 합의 이혼하게 됩니다.

결혼 생활 중 진 세버그는 전미 유색인 지휘향상 협회의 회원이었기에 흑인과 아시아인들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던 그녀는 언론의 희생양이 됩니다. 정치적으로 반대 입장에 있었던 집단이 진 세버그의 명성을 깍아내리려 했었고, 그로인해 그녀는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죠. 로맹 가리 또한 언론의 잔혹성에 의해 평가절하 되기 시작했죠. 로맹 가리는 평론가들에 의해 자신의 또다른 가명인 에밀 아자르와 비교되며 "그런 글을 쓸 능력이 없다", "로맹 가리는 끝난 작가다.", "진부하다", "로맹 가리의 문체는 고루하기 짝이 없다" 등으로 평가절하 됩니다.

 
그 후 1979년 진 세버그가 실종되고, 실종 10일 만에 변사체로 발견된 진 세버그의 사인은 약물과다복용으로 인한 자살. 하지만 열렬한 흑인민권운동가로 활동하며 FBI와 갈등을 빚어왔던 진 세버그였기에 '그녀의 죽음이 FBI에 의한 살해다'라는 의견도 분분하며, 로맹 가리 역시도 기자회견을 통해 'FBI의 공작이 진 세버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년 후, 로맹 가리는 1980 12 2, 권총으로 자살합니다. ‘결전의 날’이라는 제목이 쓰여진 그의 유서는 ‘진 세버그와는 아무 관계없다.’로 시작해서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로 끝맺었습니다.

◎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가 동일인이라는 건 자살 후 반년 뒤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 출간 되었고, 이 책에선 에밀 아자르가 바로 로맹 가리이며, 아자르라는 이름은 로맹 가리가 쓴 다섯 개의 필명 중 하나였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가명을 쓰게 된 이유는 세상에 대한 모순을 느꼈기 때문이며, 작품의 본질을 보는게 아닌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얼굴'과 명성을 평가 기준으로 하는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미 두 번이나 가명을 쓴 적이 있었다고 언급합니다.

이로 인해 로맹 가리는 역사상 공쿠르를 두 번 수상한 작가라는 신화를 남겼습니다. 

또한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의 사이의 상관관계를 단호하게 부정했던 평론가와 기자들의 무능함과 독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코미디이며, 그들의 전문가적인 권위와 체면을 어떻해 유지하며 살았는지도 궁금하기도 합니다.

로맹 가리는 문학과 자신을 통해 충분히 세상에 자신을 표현한 문학가였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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