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정보를 알려드리는 다올입니다.
오늘은 저번 10가지 미스테리에 이어 또 하나의 미스테리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1950년 6월 25일(일) 새벽 3시, 김일성은 긴급내각회의를 소집합니다. 이때 이승만이 북침을 했다고 거짓 주장을 하며 헌법에 따르면 오직 내각이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으니 빨리 남측에 대한 역습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김일성은 총사령관 명의로 전쟁을 시작할 것이라 말했고, 내각을 향해 모두 동의하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이에 내각이 동의하며 북한의 정권은 최종적으로 남침을 확정했죠.
불과 한시간 후, 새벽 4시 비오는 가운데 "폭풍"이라는 작전명 아래 북한은 전면적인 남한 침공을 개시했습니다. 탱크 350대와 20만의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대한민국을 공격 했죠. 우리 군세는 적군의 절반 밖에 되지 않았고, 거기에 장병들은 외박, 휴가를 가있던 터라 속수 무책 북한군의 기습에 당했습니다. 그렇게 3일만에 서울을 함락당했습니다.
그런데 북한군은 서울을 함락 후 3일간 진격을 멈춘 것입니다. 즉, 7월 1일까지 북한은 서울에 멈춰있었던거죠.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북한이 진격을 멈춘 그 3일이 우리한테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속전속결로 전쟁을 종결하려한 김일성의 계획과는 다르게 7월 2일 일본에 주둔해있던 미군 24사단이 도착을 했고, 우리군이 부대를 재정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해준 것입니다. 그렇게 북한군의 날카로웠던 기세 또한 한층 꺽입니다.
만약 북한이 서울 점령 후 3일간 멈추지 않고 계속 진격했다면 아마 지금 우리들의 집 안에는 김씨 집안 초상화 사진들이 걸려 있었을 것입니다. 왜 3일간 진격을 멈춘 것을 두고 미스테리라 하는 것이죠. 여기에 대해선 많은 이유들이 존재 합니다.
◎ 북한군이 3일간 서울에 머무른 이유
1. 북한은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한게 아닌 3일씩이나 걸려 서울을 점령했기 때문입니다.
북한군의 원래 계획은 2개의 군단을 운용, 1군단은 의정부를 넘어 들어오고 2군단은 춘천을 빠르게 점령 후 수원을 점령해 서울을 포위 섬멸 하려 했던 것입니다.(1,2 군단이 남북으로 포위) 그리고 남한 내에 이승만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잡아 빠른 항복을 받아내려 한것이였죠.
근데 춘천에서 6사단의 활약이 대단했던 것이죠. 화력의 엄청난 열세에도 불구하고 선전을 합니다. 탱크로 무장한 북한군에 육탄공격까지 마다하지 않으면서 저지했다고 합니다. 거기다 포병들이 쏜 포탄들이 백발백중 북한군을 타격하며 북한군을 춘천에서 3일이나 저지했습니다. 포신이 열로 빨갛게 달아오르면 물을 부어 식히면서 항전을 했다고 합니다. 북한군은 춘천에서 2천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하며, 6사단의 선전은 개전초기 엄청난 역할을 해줬습니다. 이후 강릉에서도 8사단이 활약하며 합세하여 효율적으로 북한군을 견제합니다.
춘천과 수원을 속전속결로 점령하고 서울을 포위섬멸 하려던 김일성의 계획은 처음부터 삐걱거렸죠. 이것 때문에 북한 1군단이 한강 방어선 전투에서 강북을 점령했으나, 2군단이 늦어지며 병력, 화력 부족으로 3일간이나 한강을 도하하지 못하고 지체함으로 국군을 섬멸할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게다가 북한군이 한강을 두고 머뭇거리는 동안 한강 이북의 국군 장병들은 자력으로 한강을 도하, 한강 이남에서 재편성되므로 전투력을 최대한 보존할 수 있었고, 여기서 얻어진 시간적인 여유는 미군과 UN군의 파병을 가능케 했습니다.
이때 총사령관 김일성의 화가 머리 끝까지 뻗었는지 제2군단 군단장 김광협과 2사단장 이청송, 12사단장 전우를 해임시켜 버립니다.
2. 남한내에서 인민봉기가 일어날 것을 김일성은 기대.
전쟁이 일어나기 전 이미 남한 내에선 남로당 세력들이 활동을 했고, 여순반란 사건 등과 같은 각지에서 총파업들이 일어났는데, 북한군이 남한내에 들어오게되면 수십만의 인민들이 봉기해줄거라 믿었던 것이죠. 그래서 전투력 손실 없이 스스로 남한이 무너질 것을 기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1950년 당시 남한내에 공산당 세력은 약화된 시기였고, 인민봉기는 없었습니다.
3. 한강교의 폭파
이 사건으로 욕을 많이 들어먹는건 사실입니다. 당시 국방부의 무능함과 삽질로 인해 국민들이나 군수물자, 한강 이북에서 싸우던 군인들이 한강 이북에서 고립되는 참사도 부른 사건이지만, 한강교 폭파의 전략적 가치로 보면 북한군 자체를 저지하는데 효과적인건 사실이였습니다. 이로인해 시간을 번 것이죠.
당시 북한은 체계적인 공병부대가 없었기에 큰 한강을 건너기 힘들었습니다. 개전초기 큰 활약을 했던 탱크들이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은 소련 고문단의 사후 평가에서도 105전차여단의 한강교 조기확보 실패를 개전 직후의 주요 실책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만 봐도 한강교 폭파의 전략적 가치는 충분히 있었던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는 당시 국군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요즘 참전용사들을 비하하며, 비난, 조롱을 하며 선 넘는 애들이 있습니다. 온전한 역사의식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출처 : https://youtu.be/ld9RbL4mHt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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