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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창고/역사

고려시대 최강검이라 불리운 척준경

by 정보알려주는다올 2020. 7. 7.

안녕하세요 정보를 알려드리는 다올입니다.


오늘은 고려 최고의 무사 척준경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출처 : 구글 이미지


척준경은 한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인이라고 평가되는 대부분인 인물입니다. 그렇기에 넷상에선 고려의 소드마스터, 소드마스터 척 이라고도 불리죠.


척준경을 다들 무관으로 알고 있으시겠지만 척준경은 고려시대 중추원 별관 출신으로 문관 출신입니다. 고려는 예종때와 공양왕 때를 제외하고 무관을 따로 뽑지 않았기 때문이죠.


척준경의 태어난 일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는 곡산에서 가난한 향리 척위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학문보다는 무술 연마를 좋아했고, 여러 무로;배들과 어울려 지냈으며, 커서는 아버지의 직책을 이어바지 않고 이곳 저곳을 떠도는 떠돌이 신세로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경주까지 흘러가 고려 11대 왕 문종의 셋째 아들인 계림공 왕희의 집에서 식객으로 들어가게 되고, 이 계림공이 1095년 고려의 15대 왕 숙종으로 등극하며 척준경의 첫 관리생활이 시작됩니다. 숙종의 수하로 추밀원의 말단관원으로 들어가 잡일을 하며 지내게 되죠.


이후 10년 가까이 잡일을 하다가 고려의 여진정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그의 운명이 뒤바뀌기 시작합니다. 1104년, 여진족이 정주성을 침공하자 품계도 없는 하급관리인 별가로 출정한 척준경이 단기필마로 나가 고려군을 구한 것이죠.


때는 제1차 여진 정벌 당시 고려의 선본장인 임간은 참패를 했고, 척준경은 당시 총사령관인 임간에게 직접 말 한 필과 무기를 달라 요구했고 궁지에 몰린 임간은 이를 들어 주었으며, 척준경은 여진족에게 돌진하여 적장의 목을 베고 아군 포로 2명의 되찾아 왔으며, 추격하는 여진군을 활로 쏘아 추가로 2명의 적장을 더 사살합니다. 이후 척준경의 용맹에 놀란 여진족은 추격을 멈추고 고려군은 무사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돌아온 척준경은 임간과 함께 패전의 책임을 물어 투옥됩니다. 이에 대해선 정황상 품계도 없는 하급관리가 총사령관에게 말과 무기를 요구한 것이 눈에 거슬린 괘씸죄를 적용했거나, 공을 시기해 죄를 뒤집어 씌워 투옥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행히 이 때 2차 여진정벌의 책임자 윤관 장군이 척준경의 목숨을 구해주고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후 윤관과 돈독한 사이가 된 척준경은 윤관을 따라 여진정벌에 참여합니다. 


2차 여진 정벌 도중 석성, 즉 지금의 함흥을 공략하는 중 당시 지휘관인 윤관이 석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하게 되자 여진족의 추격이 두려운 척준경에게 장군 이관진과 함께 성을 공략하라고 명령하게 됩니다.


이에 척준경은 "죄를 지어 죽을 몸이었던 저를 살려주신 장군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혼자서 칼 하나 방패 하나를 들고 성벽위로 올라가 적장 서너명을 죽이고 여진족의 진영을 흐트려뜨리며 함락시키는 믿지 못할 전공을 세웁니다.


이후 가한촌 병목 전투에서 여진족의 기습을 받아 윤관이 수하 100명과 포위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척준경은 따라온 동생 척준신이 자살행위라 말리자 "늙으신 아버님을 부탁한다"는 한마디만 남기고 결사대 10명과 함께 수만 여진군에 돌격했으며, 결국 윤관을 구해 냅니다. 모두 지난 날 윤관에게 진 은혜를 갚기 위함이였고, 이때 윤관이 눈물을 흘리며 척준경에게 "앞으로 나를 아버지라 여기라"고 이야기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다시 수만명의 여진족 군대가 영주성을 공격했을 때 결사대를 이끌고 나가 여진족을 무찌르고 개선 했으며, 웅주성이 포위되었을 때는 홀로 일반 병사 옷을 걸치고 창 하나를 든 채 성벽을 타고 내려와 포위망을 돌파하고 정주성에 들어간 뒤 병사들을 이끌고 여진족을 격파 했다고 하며, 이와같은 이야기들은 모두 야사가 아닌 실록(정사)에 기록된 내용이다.


여진정벌 당시 척준경이 대파시킨 여진족 장수들은 훗날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와 함께 중원을 장악했고 금나라의 중신들이 되었고, 이들의 기억에 남은 고려와의 전쟁은 금나라가 고려에 단 한차례도 전쟁을 벌이지 않은 것으로 봤을때 어땟을지 미뤄짐작되어진다.


고려로 돌아온 척준경은 순탄치 않은 조정생활을 합니다. 고려 중기 최악의 권신이라 불린 이자겸과 사돈을 맺었고, 이때 인종의 세력에 의해 아들과 동생이 살해당했으며, 이로인해 이자겸의 난을 일으켜 함께 대권을 장악하기도 했으나, 이후 인종의 이간질로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가 틀어지고 스스로 인종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척준경은 이자겸을 몰락시키고 최고 권력자가 됩니다.


하지만 이자겸의 난 당시 이자겸과 함께 궁궐을 범했고 전각을 불태웠기에 반역열전에 기록되었으며, 탄핵을 받아 엄타도로 귀양을 가게 됩니다. 인종은 그간의 공로를 인정해 죄를 감해 주고 고향인 곡주로 옮겨주며 처자식들에게 척준경의 소유 논밭을 돌려주었고, 이후 척준경은 1144년(인종 22년)에 병사 합니다.


한반도 최고의 무사라고 생각되는 인물 중 한명인 척준경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예전 '도깨비' 드라마에서의 도깨비 모티브를 척준경에서 따왔다는 말도 많았죠.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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