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정보를 알려드리는 다올입니다.
오늘은 김일성이 어떻게 북한의 지도자가 되어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고 지금과 같이 신격화가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출처 : 구글이미지(동아일보)
김일성은 6.25의 원흉이죠. 수 많은 사람들은 해방이 되고 김일성이 곧 바로 북한의 지도자로 등극한줄로 알고 있죠. 그리고 김일성은 신격화 되었죠. 솔방울로 수류탄을, 가랑잎으로 두만강을 건너며, 축지법을 쓴다는 둥 셀 수도 없이 말이죠.
사실 김일성의 일대기를 보시게 되면 과연 이 사람이 한 집단의 우두머리로써 자격이 있는가 싶을만큼 의문을 가지게 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김일성을 보면 일생이 운의 연속이였던 것 같은 모습이 많이 보게 됩니다.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 북한에선 이 날을 태양절이라 하죠. 그래서 어릴때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이 평안도 지역이 상당히 기독교 전파가 많이 되어있었죠. 그래서 어릴적 김일성은 교회를 곧 잘 나갔다고 합니다.
어릴때 만주에 넘어가며 중학교 시절 공산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학교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 발각이 되어, 당시 다니던 학교에서 퇴학을 당합니다. 때마침 중국 공산당에서 일본이랑 싸울 다민족 국가 용병들을 모집했죠. 김일성은 그 단체에 들어갔고, 그게 바로 동북항일연군 이죠. 항일 게릴라 단체였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을 스타로 만들어 버리는 사건이 터지죠. 보천보 전투입니다. 그분들은 이걸 참 지겹게도 울궈 먹죠. 이것 때문에 김일성을 독립운동가라 하는 말이 나오고 있죠.
보천보 전투란 함경남도(양강도) 보면 혜산이라고 있는데, 여기 보천보라하는 외진 곳이 있습니다. 거기다 만주에 가깝죠.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 90여 명, 재만한인조국광복회원 80여 명 총 170여 명을 이끌고 주재소(파출소)를 칩니다. 거기 순사 5명이 있었는데, 순사 5명은 습격에 도망치고 한 순사의 2살 여아와 일본인 요리사 민간인 총 2명을 죽입니다. 그리고 그 주재소의 총 5정이랑 총탄을 탈취한 사건입니다. 도망간 순사들은 신고를 했고, 일본은 경찰추격대를 보내 김일성의 부대와 교전을 하는데, 이 전투에서 항일연군은 50명, 일본측은 20명의 사상자를 냅니다. 그리고 김일성은 만주로 도주하죠.
이걸 보천보 전투라고 하는데, 이걸 전투라고 하기도 민망한 사건이라 생각듭니다. 습격이 더 어울려보이며, 거기다 김일성 부대쪽이 사상자도 더 많았죠. 그런데 이 사건이 김일성을 일약 스타로 만들어 버리죠. 우리나라의 동아일보를 통해 이 전투가 전국에 알려진 것이죠.
당시 사실상 만주내에도 독립군은 없었고, 조선의 백성들은 독립군의 존재에 대해서도 잘 몰랐죠. 근데 항일세력이 그것도 한반도 내에 진입해 일제와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에 조선내 백성들과 일본에게 큰 충격을 안겨 줬습니다. 동아일보의 보도 탓에 조선내에 많은 사람들은 김일성의 존재를 알게 되었죠. 동아일보의 신문기사 한면에 의해 반일 세력들은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김일성을 찬양하기 시작했고, 구전을 통해 보천보전투는 과장되기 시작합니다.
이로인해 일제는 문제가 발생했고, 만주나 한반도 지배가 물렁해진것도 모자라 항일세력이 한반도 내에 진입을 했었으니 말이죠. 그래서 만주의 항일세력과 도적들을 쓸어 버리기로 합니다. 수십만의 관동군이 만주로 향해 만주 내의 도적단과 항일 게릴라들을 소탕합니다. 김일성과 동북항일연군은 이 일본 관동군의 토벌을 피해 소련의 연해주로 튀어버리죠. 이때부터 김일성은 소련과의 인연이 시작됩니다.
당시 소련극동군 88여단에서 활동을 하죠. 해방이 된 후 소련 말 잘듣기로 소문난 김일성은 스탈린 앞에서 면접을 보죠. 소련군에 그동안 협조를 잘한점들이 반영되어 스탈린은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낙점을 찍고 그렇게 북한의 지도자로 세워졌죠.
원래 스탈린은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북한의 지도자를 박헌영으로 할지 김일성으로 할지 말이죠. 박헌영은 주 활동 지역이 남한 이였으니 알아서 잘했던 박헌영은 놔두고 말 잘듣는 김일성을 택했다고 합니다. 일설로는 스탈린은 노련한 용병술을 통해 사람을 본바 박헌영은 나름대로 식견이 있었고, 인민을 위하는 애국심,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스탈린과 맞지 않았고, 자존심이 있어 소련의 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걸 알았기에 충성을 말하는 김일성을 택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김일성은 소련군 대위 계급으로 소련군과 함께 북한에 들어옵니다. 김일성은 보천보전투의 영웅이자 소련군을 이끌고 일제로 부터 조선을 해방시킨 영웅으로 포장되며 사람들의 열열한 지지를 얻게 됩니다. 당시 북한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고 하죠. 나이도 지긋한 장군인줄 알았던 김일성이 새파랗게 어린 놈이 장군이라 하니 사람들이 김일성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짜설이 나온 것이죠.
그래서 김일성은 이와같이 북한 주민들 앞에 처음 나선 것이죠. 그렇지만 원래는 북한에서 김일성이 권력을 잡는게 쉽지 않았습니다. 앞에 언급했듯 김일성은 가짜같고 기반도 없었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북한은 시작부터 숙청의 역사가 시작되죠.
많은 민중들의 지지를 받던 조만식 선생을 소련의 지원하에 제거를 했지만 이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녔죠. 남한에는 박헌영 같은 남로당파 세력이 있었고, 또 얼마지나지 않아 중국에서 팔로군 휘하에 있던 조선의용군 연안파 김두봉 같은 사람도 들어왔고 또 소련에서 보낸 소련파도 있었으니 말이죠.
북한이 아직 나라를 못세웠기에 행정업무를 볼만한 조선인들을 보내왓던 것이고, 그런 소련파도 무시하질 못했죠. 소련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허가이가 있었죠. 많이 배운 사람들이 엘리트 집단이였고, 이렇게 젊고 경험없고 무식한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가 되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김일성의 뒤에는 스탈린이 있었죠. 특히나 제일 경계 인물인 김두봉을 중심으로한 연안파 세력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무장한 군인들이였으며, 그들이 북한에 들어올 때 소련이 도와줍니다. 연안파 군인들을 무장해제 시켜버리고 북한에 입성 시킨 것이죠. 무기를 뺏기다보니 연안파는 힘을 쓰지 못했죠. 그러다보니 당내는 김일성파가 득세를 했고, 스탈린의 압도적인 지지하에 당시 경쟁자들 모두를 이기고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됩니다.
그 이후 남한을 침략하는 큰 사고를 칩니다. 처음엔 서울도 점령하고 잘되는가 싶었죠. 주력이 된 조선의용군 출신 군대들도 중국에서 국공내전까지 경험하며 백전노장이였기에 전투력이 막강했죠. 근데 예상과 달리 우리 국군과 UN군이 열심히 싸우며 선전하죠.
한때 김일성이 평양을 버리고 강계까지 도망가기도 하죠. 전쟁이 소강사태가 되니 김일성은 어땟을까요, 쪽팔렸겠죠. 자신있게 전쟁 일으켰는데 사람만 많이 죽고 얻은건 없이 도주까지 했으니 민망하겠죠. 6.25전쟁 막바지였던 1953년 3월 전쟁 책임을 묻죠. 남로당의 박헌영한테 말이죠. "니가 전쟁하면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한다며? 너 미군 스파이지?" 이런식으로 전쟁책임을 물어 누명을 씌워서 박헌영을 체포합니다. 그리고 그때 소련파의 허가이도 박헌영을 두둔하다 자살(?)을 시켜버리고 거기다가 평양방어를 못했다는 이유로 연안파 김무정 같은 사람들을 숙청해버린뒤 다다음해 박헌영을 사형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이후 김일성은 자신을 신격화 시키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신격화는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시작한건 6.25가 끝난 이후부터죠. 전 지역에서 김일성 동상을 세우고 방송에는 위대한 수령이라 하고 유일한 전적이였던 보천보 전투를 가지고 뻥튀기를 합니다. 김일성이 200명을 데리고 일본군 수십만을 쓸어버린 전투라고 말이죠. 그렇게 열심히 신격화를 하던 중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분위기가 달라지죠. 소련에서 스탈린이 죽고, 이때 스탈린도 자기 신격화를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급사 후 후루시쵸프라는 사람이 서기장이 되는데, 이 사람은 개인 신격화나 숭배 같은걸 철저히 비난하죠. 그러다보니 소련파와 연안파 잔존 세력들이 신격화를 반대하고 나서는데 이때 김일성파는 지도자를 모욕해선 안된다며 연안파 소련파 세력들을 몇 달에 걸쳐 죄다 소탕합니다.
이걸 56년에 벌어진 8월 종파사건이라 합니다. 이 사건으로 죄다 실각시키거나 수용소로 보내버립니다. 남로당파, 연안파, 소련파 죄다 쓸어버리고 1인 독재체제가 시작이 됩니다. 그렇다고 숙청이 멈춘것이 아니죠. 자신의 김일성파 내에도 자신들과 생각이 조금 다른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갑산파 입니다. 이 사람들은 일제때 함경도 갑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라 갑산파라 불렸습니다. 이후에 김일성을 곧 잘 따랐지만 60년대 경제정책 분양에서 갈등이 생기죠. 김일성이 "우리는 소련과 중국과 다르니 우리방식대로 가자, 군비 확장을 하고 아이들에게 장난감 보단 총을 쥐어줘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소리를 들은 김도만과 박금철, 리효순 같은 갑산파들이 걸고 넘어지죠. 군비확장이 먼저가 아닌 인민들 민생이 먼저라고 말이죠. 그걸들은 김일성은 열받아 갑산파를 제거하며, 목민심서를 금서로 만들었죠.(지금은 아님) 이렇게 김일성은 1인 독재체제를 완성합니다.
그렇게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던 전무후무한 1인 독재체제가 완성되었고 3대 세습까지 이어져왔습니다. 김일성이고 김정일이고 김정은이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놈들이 현장가서 아는척 하고 자기들 뇌피셜로 정치를 하는 것이죠. 전문가들은 다 죽이고 자신의 말 잘듣는 애들만 앉혔으니 나라가 잘 굴러갈 수가 없는 것이죠.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출처 : https://youtu.be/Cl74m_4aK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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